e데일리뉴스 |지난해 3월 정부가 용인 남사에 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용인시와 평택시 간의 갈등이 다시 재현될 것으로 점쳐졌다. 사업대상지 일부가 송탄상수원보호구역에 포함돼 있어 보호구역 조정 문제가 또 불거졌기 때문이다. 송탄상수원보호구역 갈등의 역사 송탄상수원보호구역은 평택 진위면과 용인 남사읍 일대 3.8㎢ 규모로 1979년 지정됐다. 이후 해당 보호구역 해제 여부를 두고 용인시와 평택시의 입장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었다. 용인시의 경우 재산권 침해를 주장하며 해제를 요구했고, 해제 권한이 있는 평택시는 수질 보호와 취수원 확보를 근거로 보호구역을 유지해 왔다. 2015년에는 두 지자체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용인시는 당시 시장을 포함한 대규모 인원이 평택시청 앞에서 농성 시위를 펼쳤고, 이에 평택시의회에서는 삭발식을 강행하며 맞불을 놓았다. 2016년 용인시‧평택시‧안성시는 공동 연구용역을 수행해 용역 결과를 수용하겠다는 합의를 하며 갈등이 봉합되는 듯했지만, 이듬해 도출된 연구 결과에 3개 시 모두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2018년에는 상수원보호구역 문제 해결을 위한 ‘상생협력 추진단’도 발족했으나 별다른 활동은
e데일리뉴스 |뇌세포에는 신경세포인 뉴런(Neuron)이 있고 이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synapse)가 있다고 한다. 뉴런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게 되면 시냅스를 통해서 다른 뉴런에게 그 정보를 전달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의 뇌에는 1,000억 개의 뉴런이 있고, 뉴런 한 개가 다른 뉴런 1,000개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시냅스의 개수는 100조 개가 된다. 하나의 뉴런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신경세포가 시냅스를 통해서 상호작용을 하며 영양을 공급하고 자극 정보를 전달하고 인지하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도 세포막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세포막은 상호침투가 가능하여 정보와 영양을 주고받으며 일정 기간, 일정 수량에 이를 때까지 분열을 계속하며 인체를 살아있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세포 하나가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세포는 영양도 정보도 전달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죽거나 10중 8,9는 암세포로 변질 된다고 한다. 하나의 세포가 얼마나 건강한지는 다른 세포와의 연결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달려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요즘
e데일리뉴스 |변태(Metamorphosis, 變態)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로 커다란 벌레로 변하는 그레고 삼사(Samsa)의 변태(變態)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삼사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여 자신이 점진적으로 벌레가 되고 그러한 변태의 사실을 인지 못하고 죽어가지만, 카프카는 소설의 말미에 삼사가 벌레로 완전히 변하는 상황을 ‘상황적 은유’로 묘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삼사가 곤충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그러한 연유로 필자는 삼사의 삶이 현대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하게 만든다. 카프카 시대의 유럽의 가족관계, 아들의 역할과 의무 등 당시 사회에 흐르는 남성 위주의 사회와 한국 사회에서의 가족관계 그리고 장남(혹은 아들)에 대한 의무나 역할에 대해 묘하게 대비시켜 독자로 하여금 작금의 우리사회에서 가족의 의미와 역할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끔 하였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곤충의 이미지와 함께 매우 중요한 분석의 요소가 된다. 삼사가 죽은 후 그의 지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와 여동생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카프카는 삼사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들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등장인물
e데일리뉴스 |[생명의 시] 백 년만의 인사 요코하마 아사노 독크에서 나는 머리 숙여 인사를 건넨다 조선인의 발음으로 드리는 쥬우고엔 고쥬센(15엔 50전)* 안녕하십니까? 또 안녕하십니까? 어떻게 안녕할 수 있겠습니까? 이리새끼 같은 몰염치로 몰아치던 백 년 전의 광기는 발톱을 감추고 염장의 시신들을 쓸고 가던 바닷물 칠월 백중의 달무리 속에서 백설기 하얀 김이 피어 오른다 오오 반달 같은 고향은 멀기만 해 어머니의 가슴 같은 노랫소리는 사라지고 죽엄의 노래만 아직 이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쥬유고엔 고쥬센(15엔 50전) 백 년이 지난 거리에서 그들은 줄을 맞추어 대지진 대피 훈련을 한다 가슴 떨리는 싸이렌에 맞추어 질서를 지키며 표정 없는 얼굴들이 지나간다 무엇을 위한 질서인가 기댈 곳 없던 목숨, 목숨들 현해탄 너머 다시 돌아가야 할 원혼들은 유령이 되어 동경 거리를 헤매인다 염천의 동경 거리에 널린 유령들의 발자국을 보아라 터진 내장을 부여안고 기어이 조선으로 기어가는 피의 흔적들을 보아라 일본인들은 보아라 눈을 감은 위정자들도 꼭 보아라 쥬유고엔 고쥬센(15엔 50전) 한 마디에 목숨을 건 조선인들의 원한 그래도 간다 고향을 찾아 간다 찢겨진
e데일리뉴스 | 존 버저(John Berger)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피사체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관계는 결코 확정될 수가 없다. 즉, 지식 및 설명 등은 결코 시각에 알맞지가 않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가릿은 이러한 현상을 회화 속에서 언어와 시각 사이의 간극으로 “꿈의 핵심 (the Key of Dreams)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우리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즉 보는 것은 언어 이전에 오는 것이며 그 언어에 의해 완전히 묘사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해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도달할 수 있는 범위는 결코 물리적인 도달 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독자들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버저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예술작품을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되어야한다. 즉, 작가(예술가) 혹은 전문가의 관점에서 작품을 보는 방향과 대중(요즘 대중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들의 관점에서 문화예술의 접근 방향에 대한 차이이다. 즉, 마가릿이 말하는 “꿈의 핵심“은 아마도 작품 속에서
요즘 우리는 문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듣곤 한다. 카페, 상품, 공원, 의복 등 다양한 곳에서 예술은 빛을 발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예술의 만무한 확장시대에 그러면 ‘예술’의 역량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예술’은 ‘디퍼밀리어라이져이션(defamiliarization; make strange)’ 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러시아의 구조주의(structuralism)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빅터 쉴라브스키(Victor Shklovsky)에 의해 주장되고 서양 철학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쉴라브스키의 디퍼밀리어라이제이션의 중요한 개념은 ‘다름의 체계(system of differences)’로 이것은 새로운 관찰의 방법이 새로운 〔언어적〕 표현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구조주의자들이 활동하던 19세기와 다르게 예술이 형태가 다양해진 지금의 시대에는 표현 방법이 ‘언어적’으로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개념을 다양한 예술에 적용하고자 하면, 디퍼밀리어라이제이션은 예술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일상적으로 보여 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상적인 것을 다시 생각하고 곱씹
생활문화 공동체 - 문화예술을 통한 개인의 가치 실현 동물에게는 문화예술이 없다. 집단생활을 하며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문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고운 소리를 내고 사람보다 더 정교하고 세련된 몸짓을 하며 멋진 둥지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것을 예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화예술은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용어다. 동물 집단은 본능에 충실하며 자연을 극복하기 보다는 순응하며, 집단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집단이 생존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다양한 지식, 행동 양식, 상징 구조 등을 통칭해 문화예술이라 한다. 특히 예술은 인간 자신에 대한 상징 구조다. 집단내의 자신을 독특한 존재로 규정하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기 위한 인간 고유의 상징 행위이다. 다양한 방법, 다양한 형식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신을 보여주는 상징이 바로 문화예술이다. 누군가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스스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이다. 구조화된 조직의 부품으로서 공동체 속에서 묻혀버린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개체로서 독특한 가치를 드러내며
■ 공동체 속의 개인의 가치규정 이번에는 문화예술의 두 가지 유익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중 하나는 공동체 속에서의 가지 규정에 관한 문화예술의 역할이다. 빈틈없이 짜인 일과를 살아가다보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가정이나 사회 또는 국가 등 ‘나 자신’이 아닌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 규정되고 요구되는 삶에 충실하며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만족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소외되기 쉽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위치와 역할이 스스로 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삶이라는 거대한 조류에 의심 없이 합류하면서 결정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나’ 아닌 외부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공동체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동체 내에서 타인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정말로 그럴까?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가치를 지닌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을까? 어느 날 갑자기 “도대체, 나는 뭐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최근에 ‘생활문화,’ ‘생활문화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고, 각 시도 문화재단에서는 생활문화 공동체를 지원하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예술봉사 단체인 [아트컴예술나눔]에서도 평택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2023년 생활문화 공동체 지원사업’에 참여했다. 지원하는 대상이 문화예술을 창작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생활문화 공동체였다. 생활문화 공동체가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문화를 생성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은 ‘예술의 일상화’라는 [아트컴예술나눔]의 목표와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이번 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번 칼럼을 통해서 생활문화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아보고, 3회에 걸쳐 생활문화가 공동체와 구성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개인의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지 알아본다. ◼생활문화, 생활문화 공동체? 비전문가도 새로운 문화콘텐츠 역량 개발 가능 생활문화란 무엇이며, 생활문화 공동체란 어떤 것일까? 생활문화는 ‘생활’과 ‘문화’라는 두 단어가 연결된 말로 비교적 근래에 자주 사용하고 있다. ‘생활’이란 살아 가기위한 다양한 활동을 의미하며, 문화란 그 생활의 결과로 만들어진 유형무형의 생활양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