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데일리뉴스 | 존 버저(John Berger)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보고 있는 피사체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관계는 결코 확정될 수가 없다. 즉, 지식 및 설명 등은 결코 시각에 알맞지가 않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가릿은 이러한 현상을 회화 속에서 언어와 시각 사이의 간극으로 “꿈의 핵심 (the Key of Dreams)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이 우리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즉 보는 것은 언어 이전에 오는 것이며 그 언어에 의해 완전히 묘사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이해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도달할 수 있는 범위는 결코 물리적인 도달 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을 독자들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버저의 주장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어떻게 예술작품을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되어야한다. 즉, 작가(예술가) 혹은 전문가의 관점에서 작품을 보는 방향과 대중(요즘 대중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들의 관점에서 문화예술의 접근 방향에 대한 차이이다.
즉, 마가릿이 말하는 “꿈의 핵심“은 아마도 작품 속에서 전문가의 관점과 대중들의 관점 사이의 간극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예술을 말할 때 ”아는 만큼 보인다.“ 라고 일상적으로 말해왔고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과 분석들을 들으면서 과연 대중은 이 작품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서 대중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실질적으로 관객들이 보는 것 그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관객들이 작품을 온전히 즐기고 보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많아야 할까?“ 감상의 범위와 깊이를 확장하기 위해 필자도 대학 때 미술사 공부를 했지만 그것으로는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부족하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나는 왜 큐레이터들이 보는 내용을 보지 못했을까? 대학 때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하고 종종 회상을 해본다. 아니면, 작품을 ”해체 (deconstruction)“할 능력이 없나? 그러면, 작품을 전문가처럼 분석을 할 수 있어야만 작품을 진정 즐길 수 있을까? 끊임없는 의문과 자괴감이 엄습해온다. 도대체, 작품을 아는 만큼 볼 수 있다고 하니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서 작품을 세세히 볼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보자.
많은 지식인들이 작품을 좀 더 넓게 이해하고 행간의 의미를 찾고 작품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내면의 의미를 고심하고 작품을 심도 있게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문학 이론을 연구하고 적용해왔다. 여러 문학 이론 중에 필자가 가장 어렵다고 느끼지만 많이 회자되는 ”해체(deconstruction)“를 활용하여 예술을 진정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까를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해체’를 간단히 이야기 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사전적 정의의 ‘해체’는 ”문학이나 철학을 연구할 때 사용되는 이론으로, 한 문장이 한가지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독자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웹스터 사전). 이러한 주장은 필자가 알기로는 ‘해체’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해체(deconstruction)“는 어떠한 단어를 들으면 우리들은 바로 그 반대 개념을 떠올려서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는 많이 왜곡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흰색에 대해 들으면 우리 뇌에서는 그 흰색의 반대되는 개념인 검은색을 떠올려서 흰색을 이해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흰색은 ”과장된 흰색“으로 이해된다. 이 주장이 사실일까? 버저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회화 속에서 언어와 시각 사이의 간극을 꿈의 핵심“ 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해체(deconstruction)“에서 주장하는 이분법(dichotomy)와 일맥 상통하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익히 시각적으로 경험한 흰색과 언어적으로 표현한 흰색간에는 ‘해체’가 말하는 간극인 ”꿈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즉, 언어로 이해하는 흰색은 이상적인 흰색일 수 있지만 시각으로 보는 흰색은 주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읽혀지는 흰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로 예술작품을 ‘해체’하면 그 내용이 매우 유동적이거나 과장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이야기는 작품을 ‘해체’했을 때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가 작품을 처음 접할 때 과연 누가 ‘해체’에서 이야기하는 이분법(dichotomy)과 그 안에 내표된 언어의 ”계층적 체계(hierarchy)“ 다시 말해서 언어가 내포한 ”특권적 이미지(priviliged)“와 ”낙인된 이미지(stigmatised)“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고 감상할까?
물론, 수원 아이파크미술관에서 몇 년 전에 전시한 게리 힐(Gary Hill)의 ”찰라의 흔적“은 ‘해체’의 이론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자에게는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특권적 이미지’인 작가(백인)가 ‘낙인된 이미지’인 노동자(히스페닉)를 보는 시각을 통해 미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갈등, 계급 및 삶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들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작가는 이러한 두 개의 ‘특권적 및 낙인된 이미지’를 작품 제작 시 염두 해 두지 않았다고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체’는 작품의 또 다른 내면을 관객들이 보도록 강요했다.
그럴지라도, 이러한 이론이 없이도 아니 이러한 이론을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들은 작품을 자세히 보며 끝임 없는 내용과 이야기를 찾고, 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를 유동적이지만 흥미롭게 할 수 가 있다. ‘해체’ 이론이 비록 흥미롭고 행간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나는 전통적인 방식의 작품 감상법을 계속 추천하고 고집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읽고 보는 예술작품은 작품을 만들 당시의 다양한 배경과 역사를 포함한 밀접한 관계들을 이해하고 감상하면 작품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물론, ‘해체’를 통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행간을 읽을 수 있으면 더욱 좋겠으나, 이러한 ‘해체’과정이 작품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필자는 전문가가 무어라고 하든 오롯이 나만의 작품 감상법으로 작품을 즐기는 것을 강력히 추천 드린다.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워 전시회나 공연장에 가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은 저와 같이 용기를 내어 나만의 작품 감상법을 익히고 전시장이나 공연장에 오셔서 즐기시기 바란다.
이러한 결심의 첫 번째는 전시장이나 공연장에 우선 나오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감상하시라는 것이다. 내가 보는 전시나 공연에서 재미있는 요소를 하나만 발견하자. 또 그 흥미로움을 통해 나름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즐기도록 하자. 필자는 작품을 그냥 즐기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혹시 약간의 이론에 관심을 갖고 계시며 작품 감상에 흥미를 더하시기를 원하시는 독자들께서는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을 한번 읽어 보시는 것이 어떠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