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데일리뉴스 |변태(Metamorphosis, 變態)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로 커다란 벌레로 변하는 그레고 삼사(Samsa)의 변태(變態)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삼사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여 자신이 점진적으로 벌레가 되고 그러한 변태의 사실을 인지 못하고 죽어가지만, 카프카는 소설의 말미에 삼사가 벌레로 완전히 변하는 상황을 ‘상황적 은유’로 묘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삼사가 곤충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전개해왔다. 그러한 연유로 필자는 삼사의 삶이 현대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하게 만든다.
카프카 시대의 유럽의 가족관계, 아들의 역할과 의무 등 당시 사회에 흐르는 남성 위주의 사회와 한국 사회에서의 가족관계 그리고 장남(혹은 아들)에 대한 의무나 역할에 대해 묘하게 대비시켜 독자로 하여금 작금의 우리사회에서 가족의 의미와 역할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끔 하였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곤충의 이미지와 함께 매우 중요한 분석의 요소가 된다. 삼사가 죽은 후 그의 지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와 여동생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카프카는 삼사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들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등장인물의 삶이 곤충의 일생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즉, 곤충들의 일상처럼 비록 중요한 가족 구성원이 죽었다 할지라도 나머지 가족들의 삶은 지속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삼사의 가족들도 모두 곤충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혹시, 가족들은 또 다른 삼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기서 벌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삼사가 곤충으로 변태하는 과정은 그와 가족과의 관계 그리고 그의 가족에 대한 의무를 상징하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카프카가 언급한데로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생의 상투적인(routine or the pattern of our lives) 현상에서 빠져나오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이 소설의 내용이 한국의 가족 관계 그리고 남자의 가족 내에서의 위치와 본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치러내는 치열한 삶과 우리가 영위하는 문화예술이 어떻게 우리의 삶에 변태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벌레 같은 삼사의 죽음이 어떻게 문화예술의 이타적인 행동과 연결되는가 하는 것이다. 일부 독자들은 이러한 필자의 생각과 주장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이 또한 필자의 논리적인(?) 생각으로 치부할 수가 있다.
우선, 그레고 삼사는 우리에게는 어떠한 인물로 비춰지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삼사가 노력해 벌어온 수입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삼사의 삶이 마치 현대를 사는 우리의 모습 같아 보인다(필자는 이 부분에서 카프카와 다르게 오직 남자들의 가족에 대한 책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님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필자는 오히려 여성이든 남성이든 가장(bread winner)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업무, 의무, 역할 등 사회생활이 요구하는 역할에 찌든 현대인의 삶이 곧 삼사의 삶일 것이다. 카프카는 그의 소설에서 삼사가 벌레로 변하는 것을 그의 독자들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를 하고 있지만 필자는 카프카의 벌레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사회와 가정이 요구하는 일만 충실히 하는 곤충과 같은 본능적인 삶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인간이 자기희생을 통해 보여주는 이타적인 삶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선입견으로 가지고 있는 징그러운 벌레의 특성을 삼사에게 투영해 그를 본능에 충실한 부정적인 인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사의 행동과 감성이 이성적이기보다는 본능적이어서 현대인들의 삶이 일정 부분은 그 벌레화 되는 삼사의 삶과 묘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 삶이라 함은 가족들을 돌보는 삼사의 곤충적인 본능을 뜻하며 그의 세상은 가족과 집이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삼사의 죽음은 그러한 본능적인 삶을 이타적인 삶으로 승화시키는 계기라고 생각한다. 소설에서는 그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삼사의 죽음이 승화 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삼사의 이타적인 죽음이 그의 본능적인 행동을 이타적인 행동으로 변화하도록 그의 독자들에게 넌지시 제시하며 그러한 이타적인 행동을 다른 가족 구성원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통해 보여줬다.
이러한 생각으로 볼 때, 현대인들의 삶에서 문화예술과 예술가들의 삶은 삼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삼사의 가족들이 삼사를 통해 누려왔던 가정의 안정과 삶의 풍요로움을 문화예술을 통해 정신적 안정과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렬하게 뿜어내고 있다. 독자들도 인지하고 있듯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는 문구가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삼사의 가족 구성원들이 삼사의 희생, 본능적인 희생을 먹고사는데도 불구하고 가족 구성원들은 삼사의 희생에 대해서는 알아채지 못하며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는 듯한데 우리 또한 문화예술의 혜택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의 이타적인 활동과 노력을 간과하고 지내고 있다.
삼사의 가족들이 삼사의 희생으로 누려왔던 것들처럼 아름다운 전시, 즐거운 공연, 행복한 체험, 우아한 여유, 품격 있는 삶이 모두 문화예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비약적인 비유처럼 보이기는 하나 삼사의 삶은 일정부분 우리 예술가들의 모습일 수 있다. 현대인들의 삶을 더욱 가치 있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삼사와 같이 예술가들은 본능적(?)으로 우리의 문화예술 발전과 향유 기회 확대를 위해 창작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삼사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소설의 내용에서 유추해보면 그가 곤충의 삶을 살았을 지라도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 대한 희생으로 볼 여지가 매우 많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예술가의 죽음과 비유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술인 및 문화예술은 현대인들의 삶을 더욱 가치 있고 풍요롭게 하는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비유적으로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의 아름다운 결말이라고도 보인다.
즉, 삼사의 죽음이 그의 가족 구성원들의 풍요와 행복을 제공한 것처럼 예술가들의 죽음은 그들의 예술적인 종말이라기보다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의 희생으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삼사는 자신의 본능적인 의무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이 벌레로 변태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과는 다르게 독자들은 소설 말미에 삼사가 벌레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은 자신을 희생하고 이러한 희생이 자신의 생명을 단축한다고 해도 죽는 날까지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독자들은 그러한 예술가들의 희생을 진즉에 간파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의 죽음은 삼사의 죽음처럼 관객들 혹은 예술 애호가들에 의해 승화되고 존중받게 될 것이다. 독자들도 모두 주지하듯이 문화예술은 우리 현대인의 삶에 조용히 젖어들어 우리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게 만드나 궁극적으로는 더 나은 삶 더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데 기여를 해왔다, 마치 삼사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필자가 이렇게 프란츠 카프카의 변태(metamorphosis)를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 현대인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차게 하는 문화예술을 사랑하자는 취지이다.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15세기 이태리 메디치 가문은 이태리 문예부흥을 이끄는 다양한 예술가 후원 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이러한 후원, 즉 메세나 활동은 이태리를 문화예술의 중심국가로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과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가문의 희생과 지원은 삼사가 그의 가족들에게 행한 아름다운 희생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독자들은 평택시 예술가들의 노력과 창작품에 감사하고 그분들 때문에 우리들은 더 행복하고 삶의 의욕이 넘친다는 사실을 염두 해 주기 바란다. 필자가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나누는 감사와 사랑을 좀 더 예술가들에게 할애해 그들의 희생이 더욱 부각되고 우리 삶의 동력이 되도록 존경과 지지를 부탁한다. 그리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삼사의 가족들의 행동을 반면교사 삼아 가능하면 우리가 사랑하고 행복을 주는 예술 활동 활성화를 위해 후원회에 직접 참여해 조그마한 기여를 해주면 예술가(삼사)의 희생이 더욱 값어치 있는 행동이 될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