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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고귀함은 지키는 것이다 : 녹색평론 복간을 반기며

유현미 평택도서관 관장

 

어리버리 사회초년생 시절, 녹색평론은 나만의 ‘은밀한 해방구’였다. 격월지로 발행되던 <녹색평론>의 새로운 호(號)가 도착하면 과월호를 집으로 빌려가 느긋하게 책장을 넘길 때면 잠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읽고 또 읽고도 모자라 일정기간이 지나면 폐기되는 다른 간행물과 달리 녹색평론만은 도서관 장서로 등록하는 특별대우 대상이었다. 녹색평론의 광팬이 비단 나만은 아니었던 지라, 녹색평론의 과월호를 찾으시며 나를 뜨끔하게 하는 분도 계셨고( 당시는 정기간행물은 대출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전국적으로 녹색평론 독자모임이 생겨난 걸 보면 말이다.

 

당시는 다소 생소한 단어들이기도 했던 기본소득, 지역화폐, 숙의 민주주의, 협동과 자치 등을 책으로만 접하다 도서관 강연에 초정해 두어 번 뵌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선생님이 교수직을 그만두고 녹색평론 발간에 집중하시던 시기였다. 어렵고도 어려운 통화의 관문을 넘어, 여러 차례 강연 거절의 장벽을 넘어 마침내 (나의 간절한 요청에 감화된) 선생께서 강연을 수락하였으나 강연 자료를 보내달라는 요청은 단칼에 거절하셨다.

 

이유인즉슨 강연 자료에 쓰인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면 자료만 읽으면 되지 힘들게 강연을 뭐 하러 듣느냐? 반대로 자료와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면 강연 자료가 왜 필요하냐? 는 말씀이었다. 듣고 보니 설득되는 말씀이라 수긍할 수밖에. 실제로 선생은 그날 요청 드린 강연내용 외에도 참석한 좌중의 관심과 이해에 따라 폭넓은 주제를 다양하게 넘나들며 열띤 강연을 하셨다.

 

당신이 직접 청탁한 원고조차 녹색평론의 논지와 맞지 않으면 절대 싣지 않는 원칙주의자 답게, 수락하셨던 강연조차도 초청단체와 뜻이 맞지 않으면 곧바로 거절을 시전 하신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던 터라, 까칠대마왕이시면 어쩌나 걱정한 것이 무색할 만큼 실제로 만나 뵌 선생님은 참 소탈하고 유머러스한 ‘어른’ 이었다. 두 번째로 뵈었을 때는 이웃의 작은 도서관에 초청받으셨을 때였는데 기억하시고는 반갑게 손 내밀어 주셨다.

 

소규모의 인원이 소박하게 둘러앉은, 따뜻한 분위기여서 그랬는지, 진지한 고민들 사이 툭툭 던지시던 사소한 농담과 따뜻한 웃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생활협동조합(생협)에 장보러 가실 때 쓰신다고 주머니마다 불룩하게 넣어둔 장바구니를 주섬주섬 꺼내 보여 주시기도 하고, 집과 가까운 생협의 판매조합원이 불친절해서 너무 무섭고(?) 상처받으신다며 좀 더 친절한 조합원이 근무하는 생협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고 하소연하시던 인간적인 모습도 그립다.

 

1991년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라는 물음과 함께 발간 후 29년 동안 단 한 번도 휴간한 적이 없었던 녹색평론이 선생 타계 후 휴간을 결정했을 때, 많은 이들이 공유지를 잃은 민중에  필적하는 상실감과 충격, 불량독자(?)로서의 자책을 경험하였기에 녹색평론의 복간소식은 단순한 기쁨을 넘어 안도와 설렘 기대를 갖게 한다.

 

선생님의 마지막 말씀은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인간의 탐욕이니, 탐욕을 버리고 생명체로서의 도리를 지키자는 말씀이셨다. 평소에 선생이 자주 하시던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순하게 살다 자연으로 돌아 가자시던 말씀과도 다르지 않다. 다시 돌아온 녹색평론은 다시금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이 물음에 답하는 일이 우리가 직면한 깊고도 황폐한 생태불안, 생태우울의 늪을 건너는 길일 것이다.

 

-'고귀함은 지키는 것이다' :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김탁환 저)에서 차용

-'공유지를 잃은 민중' : 황규관, 2023.6.12. 경향신문, 녹색평론과 김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