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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창간 1주년 기획 특별인터뷰] 백승종 역사가 “괴태곶봉수대 시와 시민이 복원 문제 적극적으로 협의해야”

국가사적 지정, 유물 등급 껑충 높아진 것
봉수대는 지금도 중요 군사요충지라는 증거
제2함대 내 봉수대 미흡한 관리 시정해야
비용 많이 들어도 정밀한 조사 작업 필요

 

e데일리뉴스 |[평택=강경숙기자] 국가사적으로 괴태곶봉수대가 지정된 후 첫 번째로 열린 토론회에서 백승종 역사가는 괴태곶봉수대의 등급이 특별히 보존가치가 높은 유물로 높아졌다고 강조했다. 봉수대의 첫째가는 주인은 평택시민들이라면서 시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시민사회가 봉수대의 소중함을 논의하고 함께 봉수대 개방이나 복원 문제를 적극적으로 협의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괴태곶봉수대의 역사적 의미와 향후 보존 방향에 대해 7일 백승종 교수의 고견을 좀 더 들어본다.

 

■ 괴태곶봉수대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학술적 가치나 의미는?

알다시피 국가사적은 특별히 보존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이번 일도 관련 전문가들이 엄격히 심사해서 결정한 줄 안다. 그동안 괴태곶봉수대는 우리 평택시의 향토유적에 그쳤지만, 이제는 등급이 껑충 높아진 것이다. 평택시민의 자랑을 넘어, 괴태곶봉수대는 국민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유물이란 인정을 받은 것이다. 참으로 축하할 일이기도 하고, 늦게나마 지정되어 다행이다.

 

■ 국가사적 지정 후 첫 번째 토론회의 의미와 역할은 어떻게 보는가?

사실 괴태곶봉수대의 첫째가는 주인은 우리 평택시민들이다. 우리의 선조가 그 봉수대를 지켰고, 거기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밝혀 국가의 안위(安危)를 알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사회가 괴태곶봉수대의 소중함을 논의하고, 앞으로 이 봉수대를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한 이유겠다.

 

더구나 괴태곶봉수대는 해군 제2함대의 영내에 갇혀있다. 시민의 출입조차 매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어, 시민들의 불만이 높다. 그동안 시 당국에서도 관심을 가졌을 줄 짐작하지만, 봉수대가 제대로 잘 관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번 토론회를 통해 시민의 높은 관심이 확인된 만큼, 시 당국도 시민사회의 지지 속에서 해군과 더욱더 봉수대 개방이라든가, 복원문제를 적극적으로 협의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토론회에서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은 무엇인가?

괴태곶봉수대에 관해 우리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가 발굴 조사다. 둘째는 봉수대의 복원이요, 셋째는 봉수대를 시민들에게 완전히 개방하는 것이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우선 괴태곶봉수대 일대를 정밀하게 발굴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여러 봉수대가 발굴되었지만, 조선 시대의 봉수대만 찾아서 확인하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괴태곶봉수대는 그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발굴하는 것이 옳은가?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 문제를 시민들과 함께 토론할 필요를 느꼈다.

 

여기서 길게 말하긴 어렵지만, 요컨대 괴태곶 지역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봉수대의 역사가 조선과 고려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갈 것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아주 정밀한 조사 작업이 필요하다. 이 점에 관한 시민사회의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당국에서도 충분한 예산을 책정해, 유의미한 발굴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괴태곶봉수대’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중요성은 어떠한가?

괴태곶봉수대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그곳은 우리 평택시민의 선조들이 천 년 넘게 지켜온 군사 및 통신시설이다. 필설로 간단히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게다가 제2함대가 평택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시민들이 자유롭게 올라가서 서해를 바라보던 곳이라 추억이 깃든 곳이다. 그때는 서평택의 각급 학교 학생들이 괴태곶봉수대로 소풍을 갔다고 한다. 괴태곶봉수대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민의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봉수대는 멀리 남쪽에서 날마다 한양/서울로 올라가는 군사 소식의 통로였다. 적의 침략이 임박하였는지, 전투가 벌어졌는지 또는 아무런 일없이 평화로운 상태가 유지되는지를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짐작하듯, 대개는 태평한 날이 이어졌다. 우리 선조들은 봉수대에 점화된 횃불과 연기를 바라보며 안도할 때가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괴태곶봉수대에는 방어시설도 있었다. 말하자면 소규모 군사 기지를 겸하였는데, 조선 시대 에는 봉수대 주변이 훌륭한 관영목장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이란 관리가 파견되어, 목장뿐만 아니라 봉수대와 ‘대진’, 즉 이 지방의 중요한 포구까지도 돌보았다. 괴태곶봉수대와 그 주변 지역은 국가의 경제 및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괴태곶봉수대 지역은 군사적으로나 경제 및 문화적으로 더욱더 민감한 요충지였다. 그런 점에서 전국 각지에 퍼져 있던 일반 봉수대와는 그 중요성에 있어 차원이 달랐다.

 

지금도 제2함대가 바로 괴태곶봉수대 지역에 있다. 또, 중국 및 동남아로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항구인 평택당진항이 괴태곶에 걸쳐 있다. 과거에도 ‘대진’은 평택과 당진 양쪽에 동시에 있었다. 그뿐인가. 미군의 해외기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도 최신이라는 험프리 기지며 오산 기지가 우리 평택에 있다. 이게 다 괴태곶이 상징하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예나 지금이나 불변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 괴태곶봉수대를 포함한 ‘제5로 직봉 노선’은 어떻게 이어지며 특징은 무엇인가?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는 모두 다섯 개의 봉수로가 있었다. 세 개는 북쪽 변방에서 한양으로 연결되었고, 두 개는 남쪽 바닷가에서 한양으로 이어졌다. 그중에서 제5로는 여수 돌산도에서 시작해 서해안을 타고 올라오다가 군산을 벗어나면 충청도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괴태곶으로 빠져나와 해안을 따라 강화도로 올라간 다음에 한양으로 이어졌다. 왜적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만든 봉수로였다.

 

사실 군산 이북에는 간봉(間烽)이라고 하는 지선이 또 있었다. 그것은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당진의 창택산을 거쳐 괴태곶으로 연결되었다. 군산-당진 구간에 왜적이 출몰하더라도 어김없이 괴태곶을 통해 한양까지 급보가 전달되게 한 것이다. 이처럼 괴태곶봉수대는 봉수로의 간선인 직봉과 지선인 간봉이 서로 만나는 요지이기도 했다.

 

■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라 중국, 고려, 삼국시대, 그 전까지도 지속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한 차원의 의미는?

우리의 고대사며 고려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서해안은 한중일 삼국이 평화롭게 교섭하다가도 때로는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이었다. 특히, 고대의 성읍 국가 시절부터 통일신라 때까지는 평택강/안성천, 삽교천, 곡교천 일대가 정치, 경제, 군사 및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

 

이 일대를 ‘대진’이라고 했지만, 대동강과 한강 및 금강에 버금가는 요충지였다. 그러므로 대진의 서쪽 끝에 있는 괴태곶봉수대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국가의 중요 군사시설이자 통신시설이었다고 추정된다. 정밀한 발굴 조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다.

 

더구나 통일신라 이전은 남아 있는 역사 기록이 매우 부족하다. 비석이 한 개만 새로 발견되어도 한국 고대사가 새로 쓰일 정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괴태곶에서 안성, 또는 직산에 이르는 고대의 유물 유적을 매우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한국 고대사의 참모습을 밝혀줄 귀중한 자산이 우리 평택과 주변 지역에 적잖이 매장되어 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이런 연구와 활동의 방법을 위한 주축과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가?

평택문화원의 역할도 중요하다. 새로 설립될 시립박물관도 이바지할 수 있는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와 더불어 우리 평택시에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며 연구에 힘쓰는 전문가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깨어있는 많은 시민이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여 문화재를 지키고, 우리 고장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저마다 식견과 입장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은 차이가 없다. 모두가 함께 모여 토론도 하고 힘도 모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 시와 도, 시민의 역할은 무엇으로 보는가?

시와 도는 시민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유물 유적을 성의 있게 잘 지키고, 또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게 노력하면 좋겠다. 시의회와 도의회도 필요한 조례를 제정하고 예산도 편성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시민의 역할이다. 시민이 먼저 나서서 연구도 하고, 유물 유적이 갖는 의미도 발견해야 한다. 시와 도에 관련 부서가 있으나, 그분들은 시민의 의견을 수용해 필요한 지원을 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공무원이란 시민의 의지를 받들어 뒷바라지하는 것이 본업이지, 앞장서서 시민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문화강국의 미래를 설계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이번 기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괴태곶봉수대를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오게 하려고 지난 20여 년 동안 애쓴 시민들이 많다. 이번 토론회를 주관 또는 주최한 시민단체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평택시와 경기도는 이러한 시민의 의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고 본다. 아직은 일부 소수의 시민만 괴태곶봉수대에 관심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당국은 곧 시민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백승종 역사가는 2009년부터 평택시에 살면서 틈틈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서강대학교와 독일 튀빙겐대학교, 보훔대학교 및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연구했다. 「조선의 아버지들」(평택시 ᄒᆞᆫ책 선정),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제국의 시대」, 「도시로 보는 유럽사」 등 30여 권의 역사책을 썼으며,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에 오랫동안 칼럼을 연재했다.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kkse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