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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人사이트

[창간 1주년 특집 사람人사이트 上편] 김성환 평택새마을금고 이사장-빵집 견습생부터 시의원, 금고 이사장까지 입지전적인 삶

밑바닥부터 평택 제일 베이커리 대표까지 40년 ‘빵 인생’
유명 체인 빵집들 제치고 평택베이커리 신세계 환경 주도
‘품질이 저하되면 부자지간에도 연이 끊어진다’는 신념으로
IMF 위기 ‘만득이 핫도그’ 하나로 승승장구 반전 ‘기회’ 맞아
큰 성공 못 거둬도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싶은 마음가짐

 

 

 

e데일리뉴스 |[평택=강경숙기자] 서민의 든든한 금융파트너로 각인되는 평택새마을금고의 김성환 이사장은 그 옛날 빵집 수습에서부터 베이커리 대표, 평택시의원, 현재는 평택새마을금고 이사장 등 평생 입지전적인 삶을 살아온 장본인이다.

 

'품질이 저하되면 부자지간에도 거래가 끊어진다'는 신념하에 고객 중심 최상 품질의 빵을 만들면서 40여년간의 '빵 인생길'을 걸었으며  2002년 7월 평택시의회 제4대부터 2010년 6월 5대까지 2선 의원을 역임했다. 

 

2020년 3월 평택새마을금고 취임당시 2600억원대였던 금고 자산이 이사장 취임 이후 만 4년 동안 두 배 가까이 증액됐다. 올해 4월 기준 4758억원까지 이룬 것이다. 평택새마을금고는 최근 고덕지점 개점과 더불어 향후 5000억여원의 자산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김성환 이사장은 평생 평택시사회복지협의회, 평택시체육회, BBS 경기도연맹평택시지부장, 한국로타리 3750지구 동평택로타리클럽 등 30여개 단체들에서 십수년씩의 활동을 하거나 봉사를 하는 등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다. 항상 쉬지 않고 움직이며 자신의 삶의 흔적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김 이사장의 삶을 e데일뉴스 창간 1주년과 더불어 들여다본다.

 

 

15세부터 제빵 기술 단기간 습득 일머리 빨라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한 김 이사장은 15세의 나이에 충북 옥천에서 무작정 맨주먹 빈털터리로 밤 열차를 타고 서울로 상경한다. 배우지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술 밖에 없다고 생각, 아는 아저씨의 권유로 당시 유명한 ‘태극당’, ‘명보제과’를 비롯해 이름 있는 빵집을 전전하며 한국식 일본어 ‘시다’로 일을 시작해 제과제빵 기술을 배운다.

 

다행인 것은 일머리가 빨라 다른 수습이 10년에 걸쳐 배울 것을 3~4년 만에 마스터 해 실력있는 제빵 기술자가 된다. 모은 돈과 대출 등으로 20대 후반부터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다. 서울에서 5개의 빵집을 운영하면서 성공하는 듯도 했지만 지인과 함께 서준 맞보증이 잘못되어 서울에서의 사업은 실패, 삶의 큰 첫 번째 위기를 맞는다.

 

“젊은 시절 무서운 것 없이 대들기만 했다가 한 실패로 생각한다. 실패 후 좌절한 시간도 있었지만 한 번 실패는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각오와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이었다. 무너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나 자신을 다스렸다”

 

마음이 톱질된 것만 같은 좌절과 아픔을 겪는다.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이 ‘마음’이라니까 마음을 다잡는다.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절박했던 시절이다.

 

 

고객 발걸음 유명 체인점보다 ‘케잌타운’으로 이어져

1996년 개점한 평택 케잌타운은 전국 체인점이 아니라 김 이사장 개인이 일궈낸 베이커리점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역마다 있는 ‘명장 베이커리’ 같은 것 일게다. 당시 평택지역에는 체인점 베이커리들이 진을 치고 있는 환경이다. 태극당, 독일제과, 뉴욕제과 등등. 유명 베이커리들이 안장된 시장에 평택 케잌타운이 과감히 들어선다.

 

당시 다른 제과점들이 버터로 빵을 만들었다면 케잌타운은 생크림을 적용시켜 맛과 품질에서 다른 베이커리보다 앞서서 인기를 끌고 1, 2층 160여평의 케잌타운은 당시 규모로도 이용자들에게 호감 반응을 보이면서 선호의 대상이 된다.

 

빵을 쟁반에 그냥 쌓아놓고 팔던 시절에 김 이사장은 하나씩 하나씩 개별 포장하는 아이디어를 처음 적용해 확산시키기도 하고 베이커리 장소를 선정하기 위해 시내버스 노선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 답사를 통해 위치의 중요성을 찾는다.

 

“‘품질이 저하되면 부자지간에도 거래가 끊어진다’는 각오로 빵을 만들고 판매했다. 하루 빵을 세 번에 걸쳐 생산하고 그날 만든 빵은 그날 판매하고 다음날 팔지 않았다. 남은 빵은 노인정, 양로원, 보육원 등에 나누었으며 철저하게 고객 위주로 빵을 생산하고 판매했다” 그 때 당시 베이커리업계 환경은 아주 어렵고 제품을 만드는 환경은 옛날 방식이었다. 그저 묵은 빵도 덤으로 주고 케이크도 만들어 일주일도 팔고 하던 환경이었다.

 

 

‘만득이 핫도그’ 찾은 고객 자연스레 케잌타운 빵 구매 매출 급등

누구도 피해가기 어려웠다는 IMF 위기 시에는 반전적으로 케잌타운에게 절호의 기회 시간이 된다. 다시 무너지면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 아이디어에 아이디어를 강구해 기발한 효자 상품 ‘만득이 핫도그’가 탄생한다. 거기에 말만 잘하면 무료로 주는 콜라와의 환상적 궁합이 적중한 것이다. 핫도그를 먹으러 온 고객들은 자연스럽게 케잌타운 안으로 들어와 수십여가지의 희안하게 생긴 빵들을 보면서 구매, 판매 실적은 급성장하게 된다.

 

많게는 하루에 2500개 정도 날개 달듯이 판매했던 만득이 핫도그는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레시피를 원하는 업주들이 줄을 잇는다. 하나의 작은 아이디어였지만 심혈을 기울이고 모든 것을 직원들과 공유하면서 연구한 덕에 핫도그 하나로 그 무섭다는 IMF 불경기의 위기를 넘긴다.

 

사람 좋고 인심 좋은 김 이사장은 젊었을 때부터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고 장사 수완이 좋다. 홍보를 위해서는 시골 구석구석까지도 환갑 케이크, 칠순·팔순 케이크를 직접 배달한다. 저녁엔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가 행사를 잘 치렀냐는 인사로 확인한다. 물론 배달한 그릇이나 도구를 수거해 오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든, 행사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한사람, 한사람 고객이든 아니든 정성에 정성을 들이는 진심이 반드시 통하게 한다.

 

 

매일 새벽 4시 기상해 운동, 일기, 편지로 하루 시작

부지런한 근성도 케잌타운을 성공시킨 한 몫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좋은 마음으로 자신의 매장 앞뿐만이 아니라 옆집, 앞집 길까지 물청소를 한다. 평생을 지금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면 1~2시간운동하고, 운동하면서 사진도 찍고, 있었던 일들을 매일 일기나 편지로 기록하는 생활이 하루의 시작이다.

 

당시 평택에서 제일가는 베이커리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공장장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서울에서도 부러워하는 기술자를 스카우트 하고 거기에 건물을 인수해 새로운 인테리어까지 가미한다. 맛이 풍부한 빵에, 세련되고 멋있는 카페 분위기까지. 빵집 인기로서는 최고를 자랑하는 시절이다.

 

공장장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베이커리 관련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뿐 아니라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을 오가며 제과제빵 신기술들도 진즉에 섭렵한다. 그런 다양한 경험으로 맛도, 멋도, 품격도 여느 매장하고는 다르게 운영한다.

 

서울국제 빵·과자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을 비롯해 김 이사장이 남다른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다 보니 부르는 곳도 많아진다. 전국으로 제과협회 강의를 다니고 호텔제과제빵학과 오리엔테이션 강의를 8년 정도 다닌다. 거기에 또 소년교도소에서 정신교육강사로 제과제빵 강의를 7년 해오는 등 봉사도 꾸준히 해오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저렇게 케잌타운은 평택베이커리 업계의 신세계를 주도하는 셈이 된다. 베이커리를 하면서는 늘 나의 이익보다는 고객중심에 두었다는 것이 운영 철학이다. 이 못지않게 스스로 내가 지나간 자리만큼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해도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정말 열심히 살다갔구나’라는 자평을 염두한다.

 

특히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식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 평생 지론이다. 자신으로 인해 누구든지 피해보는 사람을 없게 하는 것이 철칙이어 사람들에게 정성을 들인다. 그렇게 들인 정성들은 케잌타운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이후 유명 체인점들은 문을 닫기 시작하고 독보적으로 평택케잌타운이 자리잡게 된다.

 

 

몸 근육뿐 아니라 마음근육, 속 근육 키우며 자기관리

70대 초반의 김 이사장은 아침에 일어나면 하는 곡주 가글과 음양탕 한 병이 빠지지 않는 건강 습관이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몸 근육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근육, 속 근육도 키우는 것으로 자기관리를 한다. 하루에 해야 할 운동이나 관리를 아침에 다 하지 못했을 경우엔 하루 종일 어느 시간을 빼서 쓰더라도 보충한다. 심지어 발뒤꿈치 운동을 하더라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맨 처음 평택으로 올 때 평택을 소비를 하는 도시, 장사를 하면 성공 가능성이 있는 도시로 봤다던 김 이사장. 자신이 사업을 하면서 정착해도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앞을 바라보는 그의 선견지명은 적중한 셈이다. 빵집 견습생에서부터 5개년계획의 평택케잌타운까지 40여년의 베이커리 삶은 전반적으로 안정적인 정착과 성장으로 그 빛을 본다.

 

김 이사장이 보기에 인구 100만 도시를 지향하는 지금의 평택은 전국에서 살만한 도시, 꿈이 있는 도시, 누구든지 도전해볼만한 도시로 본다. 젊은이들이 찾아와 아이를 낳고 키워도 괜찮은 도시, 친환경 도시이자 누구든지 평택에 오면 더 나은 삶을 살고 성공할 수 있는 도시라는 것이다.[下편에서 계속]/kksenews@naver.com

 

 

-주요 경력-

(전)대한제과협회 평택시지부장

(전)대한제과협회 중앙회부회장

(전)평택시 사암연합회 불교신도회장

(전)평택시 충청향우회 연합회장

(전)국제로타리클럽3750지구 동평택로타리클렵 24대회장

(전)한국 BBS경기도연맹 평택시지부장

(전)평택시 인라인연합회 회장

(전)평택시 볼링협회 회장

(전)평택시호스피스 운영위원장

(전)평택시 단기여자보호소 운영위원장

(전)평택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전)평택시 연탄 나눔 초대 공동대표

(전)평택시의회4대·5대 시의원

(현)평택시 의회 의정동우회 회장

(현)평택시 지역금융협의회 회장

(현)한국메세나 협회, 평택메세나 협회 이사장

(현)평택새마을금고 이사장